BOOK/소설
양귀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후기
2024. 10. 18. 15:06
이 소설의 존재 자체를 안 지는 꽤 오래 되었다. 잘 쓰인 소설이라고 여기저기 추천글이 도는 걸 봤기 때문.
하지만 한창 자극을 줄 도파민만 찾아 떠돌던 독서 습관 탓에 이전엔 이 책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무슨 내용인지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 책은 오랫동안 위시리스트에 담겨있기만 했다. 가장 큰 도파민이 이 소설 속에 담겨있는 줄도 모르고.
그러던 9월 말, 2인 독서클럽(이라고 명명해본다)을 시작한지도 벌써 반년이 되어갈 무렵이니 독후감을 쓸 정도로 깊은 울림을 줄 만한 책이 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 일단 이 책의 개요를 살펴본다. 어쩐지 이젠 읽을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 외였다. 20대 후반의 여성이 잘나가는 남자 배우를 납치하여 감금하고 조종하는 이야기라니. 여성주의적인 내용이 많이 담겨있다고 들었는데…. 그것과는 사뭇 대조된다고도 느껴지는 파격적인 개요에 흥미가 가득 차올라 친구에게 들고 갔고,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곧바로 10월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내 집 근처 도서관에는 이 책이 없고, 권역 내 멀리 있는 도서관 단 한 곳에 이 책이 있더라.
상호대차를 신청해서 이틀만에 받았다. 우리나라 도서관 시스템은 정말 훌륭하다.
시작부터 강렬했다. 작가 양귀자 씨의 세련된 문장력이 돋보이는 도입이었다.
첫 장을 펼쳤을 때 나온 이 노트 발췌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몇 번이고 되뇌며 읽었던 것 같다.
소설 속 주인공인 '강민주'는 1992년이 아닌 현시대에 쓰여졌다고 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은 급진적인 사상의 소유자이다. 부유하고, 냉철하고, 뛰어난 지성을 갖춘 그린듯한 주인공. 여성들의 사연을 '소재'로서 수집하기 위해 여성문제 상담소에서 상담원으로 봉사하는 사람. 그들의 안일함과 답답함을 한심해 하면서도 사연에 연민과 분노를 느끼고 마는 사람. 그리고, 여성으로 태어나 마땅히 가져야 할 권리와 의무로 삶을 무장한 사람.
나는 강민주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도 더 전에 태어난 인물이라니. 이 책이 요근래 나왔으면 과연 반응이 어땠을지 싶은 자연스러운 궁금증까지 들었다.
양귀자 씨의 소설을 제대로 읽어본 건 처음이기 때문에 더더욱, 놀랄만큼 날카로운 문장과 대사의 연속이었다. 세간의 평을 보면 다른 대표작 「원미동 사람들」(분명 나도 공부하며 읽어보긴 했을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어서 놀랍다고들 하던데. 나는 이 소설이 양귀자 씨에 대한 첫인상이나 다름없이 다가왔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까? 그 전개 능력이 부럽기까지 한 기묘한 감정에 휩싸인 채 읽어나갔다. 동네에 있는 도서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상호대차를 해 가며 이 책을 빌려온 거였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소장해서 내 옆에 끼고 살고 싶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떤 기분이냐... 이렇게 글을 잘 쓴다는 건?
초반부를 보면, 이렇게 완벽을 뛰어넘어 신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누구에게 흠 잡힐 것 하나 없는 강민주가 어째서 한 남자 배우를 납치의 희생양으로 삼아 그를 조종하게 된다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90년대에는 감히 입으로 담기 힘들었던 여성 욕망의 발산, 혹은 쓸모 있는 유명인 '확성기'로서 그를 이용하기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민주는 그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결코 그러지 못할 때, 강민주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철저한 계획 속에 모든 것을 차곡차곡 쌓아둔다.
모든 여성이 꿈에 그리듯 이상적인 외모와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올 것 없는 선량한 성격을 지닌 백승하는 오히려 그 완벽한 이유 때문에 민주에게 낙점된다. 그 수많은 남성 폭력을 겪고도 여성들은 그를 통해 환상을 보게 되고, 현실을 극복할 힘을 잃는다. 내가 선택한 남자가 잘못된 것일 뿐이었고, 어쩌면 다른 이들은 믿어도 되지 않을까 착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백승하가 가진 가장 큰 죄였다.
솔직히 진짜 좀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아니, 진짜 미안함을 느꼈다. 내가 만든 캐릭터 중에 미모 때문에 다른 인물에게 거의 납치감금 되다시피 하는 남자 배우가 있어서 이 소설에 더 흥미가 갔었다. 그래서 어렴풋이 강민주가 그를 납치하는 이유도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고 추측하고 있었는데…. 이는 비교할 수 없이 놀랍게 느껴지는 사유였다. 진짜로 죄송합니다, 강민주 님. 다 생각이 있으셨군요.
이 계획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지 궁금해하던 중,
94페이지에 이르러서야 백승하는 강민주와 그의 충실한 심복 황남기의 계략 아래 납치되고야 만다...
나는 백승하에게도 이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인생에 벼락을 맞은 기분일 테다. 남에게 부끄러울 것 없이 선량하게 잘 살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두 사람에게 납치되더니 무자비하고 잔인한 폭력마저 감당해야 했다. 사랑하는 아내, 아들과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백승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사실, 나는 그가 강민주의 동기에 대해 이해나 할까 싶었다. 반듯한 인간일수록 '뒤틀린' 사람을 감내하지 못한다. 이 소설 속에서 강민주는 마치 신과 같다. 인간은 신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받아들이는 일 뿐이다. 아니면, 신에게 대적하다 파멸을 맞이하거나.
그래서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민주에게 감화되다 못해 호감까지 느껴버리는 백승하가 민주를 감쪽같이 속이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내 의심하며 읽어나갔던 것 같다. 정말 그는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연기력으로 유명한 배우였으니까. 아무리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에겐 호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협조적으로 굴 수 있을까? 챕터를 시작할 때마다 나오는 강민주의 노트 발췌문은 내게, 어떤 방식으로든 이 범행이 발각되어 잡히고 난 뒤, 타인에 의해 세상에 공개된 회고록처럼 느껴졌기에 더더욱 그랬다.
이 범행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날 것이다. 강민주의 죽음도 명백했다.
그럼 그건 누구에 의해서일까. 신을 속이려 든 인간?
범인은 가까이에 있었다. 신은 가끔 실수를 했다. 강민주는 신처럼 완벽하지만 결국 인간의 모습을 띤 존재다.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있기에 백승하를 위해 그의 아들을 납치하다 꼬리가 잡혔고, 미처 처리하지 못한 김인수라는 하찮은 인간은 신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신도에게 애정을 준 나머지 그의 이상증세를 깨닫지 못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사랑하는 신이 온전히 제 이상향이기를 간절히 바라던 신도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러이러한 점이 아쉬웠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은 감정이 들기 마련인데, 나는 이번엔 이상하리만치 한 점 아쉬움도 느끼지 못했다. 백승하에게 큰 애정을 주고 마는 강민주의 실수도, 그런 상황에 큰 질투심을 느낀 황남기도, 김인수가 강민주를 스토킹하다 범행을 알아차리고 경찰을 부른 어처구니 없는 상황마저도…. 이 모든 게 그저 일어나야 했던 일들처럼 느껴졌다. 김인수가 마지막에 인터뷰하며 남긴,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 같은 언급 따위도 지독하게 현실적이었다. 누가 보면 허무하다고 할 수도 있을 법한 결말은 신화에 가까웠던 범행 과정을 현실로 끌고가며 여운을 남겼다. 소설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환상적인 인물이지만, 현실과 맞닿아있기에 그런 죽음을 맞이한 거다.
1992년에 쓰여진 이 글은 2024년에 보아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꽃밭처럼 받아들였던 '순진'한 백승하, 넘봐서는 안 될 이를 넘보다 결국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제 손으로 소유해버린 황남기, 이 소설의 최대 빌런이나 다름없는 스토킹남 김인수. 세상은 하나도 나아진 게 없다. 이 소설에 나오는 남성상들은 마치 시대의 축소판과 같다. 그나마 마음에 위안을 주는 부분이 있다면, 순진했던 백승하가 강민주의 동기를 절절하게 이해해버린 것. 백승하에겐 끝내 강민주를 배신할 마음이 (적어도 연극을 마칠 때까지는) 없었다는 것. 세상의 품으로 돌아간 백승하가 결코 납치되기 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으리란 것. 강민주가 사라진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생각해볼 만한 여지가 있었다. 책의 맨 끝에 붙은 해설 속 내용처럼, 실은 우리들 중 누구라도 마음 속에 강민주의 칼날을 키우고 있지 않을까 하는 점도.
이 책을 더 어릴 때 읽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마음을 가졌을지도 궁금해지지만,
오늘에서라도 양귀자 씨의 책을 읽고 강민주를 만난 것은 둘도 없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표지 일러스트는 앙리 마티스가 1947년 그린 그림이던데, 남성의 시선으로 해석된 여성의 인체를 표지로 정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는 후기도 보았다.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감상이다. 나는 적당히 강민주가 죽음의 순간 입었던 순백의 비단옷을 떠올리기로 했다.
이하는 인상깊은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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