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소설
브람 스토커 「드라큘라」 후기
2024. 9. 30. 17:59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에 등장한다는 드라큘라 씨의 원작이 되는 소설을 읽었다.
구입해둔 지는 굉장히 오래 되었는데 이제서야 읽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전동석 씨가 나오는 뮤지컬 드라큘라에 관심이 있었기에 더 흥미를 가졌던 것도 있는데,
읽고 보니 뮤지컬은 그냥 원작을 기반으로 한 2차 창작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전혀 다르네 이거...
미나와 드라큘라 사이에 로맨스가 전혀 없잖아?
소설 「드라큘라」는 편지, 기사, 일기 등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이 방식이 상당히 흥미로우면서도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쓸데없는 잡설도 많이 덧붙여져 있는 터라 모든 부분을 집중해서 읽기란 너무도 어려웠다..
특히 19세기 말인 1897년 출간된 소설이다 보니 백인 관점에서 자꾸만 튀어나오는 인종차별은 그냥 당연한 수준이고, 작가가 묘사하는 여성 캐릭터의 언행이란… 2024년의 내가 보기엔 아.. 정말 감안하고서도 못봐주겠다 싶은 문구들이 너무 많았다. 사실상 시대상을 감안하면 여주인공인 미나 머레이도 상당히 진취적인 신여성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읽기엔 힘든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는 겨우 스무 살하고 아홉 살밖에 안됐는데
나도 루시의 나이 세는 법을 내 삶에 적용하겠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여성 캐릭터인 미나와 루시가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남성을 찬양하고, (ex. 루시 왈: 우리 여자들이 이런 남자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나 모르겠어. → 네? 뭔소리세요) 남자들은 아름답고 똑똑한 여성을 숭배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사실상 철저하게 자기 아래 둬야 하는 약자(말이 약자지 그냥 배제 대상, 2등 시민) 취급을 하고, 자기같은 남자들의 사랑을 받는 게 얼마나 여성에게 행복한 일인지 끊임없이 세뇌를 한다. 진심 세뇌 수준이다. (ex. 루시 양이 비록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긴 하지만, 자기를 사랑해 주는 멋진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행복한 일이야. → 행복하겠니? 지금 디져가는데...)
그리고 더 신경쓰였던 것은 19세기의 의학 수준이었다. 아파서 기절한 사람에게 자꾸 브랜디를 먹인다. 최근 닥터 프렌즈 유튜브에서 다룬 의학의 역사를 몰아서 듣다 보니 과거에 뭣도 모르고 했던 최악의 의료행위들에 대해 익혀둔 참이었는데(ex. 사체액설을 위해 아픈사람에게 술먹이고 비소먹이고 아편먹이기 등) 여기서 정말 그대로 하고 있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정말 진심인가 싶은 건 피가 모자라 죽어가는 루시에게 해준 네 남자들의... 수혈이었다.
그랬다. 혈액형 검사조차 없이 피를 줬다.
「그럼, 수혈하는 일이 시작된 지 얼마나 됐나?」
「한 열흘쯤.」
루시가 AB형이었기를….
루시와 그 남자들이 모두 혈액형이 동일하지는 않을 테고, 자꾸 루시가 죽어가는 게 이 남자들이 무식하고 용감하게 실행한 수혈 때문이 아닌가 싶을 만큼 너무도 신경쓰였다. 브람 스토커는 아마 수혈을 뇌피셜로만 접하고 소설에 사용한 것 같았다. 애초에 혈액형이라는 게 나눠져 있다는 사실은 20세기 초에나 밝혀지잖아..
그렇지. 그는 수혈이 루시를 사실상 자신의 신부로 만들었다고 말했지.
아진짜 죽은 사람 두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 무례한 것들아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고, 올드 파르는 169년을 살았는데,
가련한 루시는 핏줄 속에 네 남자의 피가 들어갔는데도 하루를 더 못 견디고 죽었단 말인가?
그게 사망 원인 아니야? 남자의 피는 넣으면 맛있어지는 마법의 가루 같은 게 아니라고요
그렇게 1권을 죽은 눈으로 대충 휙휙 넘기다시피 읽다가 마지막에 누군가에게 피를 빨리는 아이들에 대한 사건이 나오고, 그 사건을 벌인 게 다름아닌 죽어서 흡혈귀가 된 루시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갑자기 흥미가 생겨서 2권은 더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내가 이 소설에서 기대했던 것은 흡혈귀인 드라큘라와 그가 만든 구울? 뱀파이어 스폰? 아무튼 그런 존재들이 벌이는 사건이었는데, 초반에 미나의 약혼자인 조너선은 내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드라큘라 성에서 탈출하는 바람에...... 1권 분량의 대부분에 드라큘라의 자취가 별로 안 보여서 아쉬웠기 때문.
뮤지컬 드라큘라의 스토리를 생각하고 본 터라 미나가 성까지 찾아가게 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조너선은 혼자 탈출하여 부다페스트 병원까지 가질 않나. 미나랑 급속 결혼을 하질 않나. 뮤지컬은 원작과 전혀 다른 2차 창작이라는 걸 알고 봤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뿐이었다. 루시가 죽고 나서 미나마저 흡혈귀 희생자가 되었을 때까진 볼 만했으나 그 뒤의 과정들이 좀.. 내겐 너무나 지루했고 드라큘라 백작의 죽음은 정말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관 속에서 자다가 아무것도 못 해보고 사망이라니. 좀 가오있게 죽여주세요.
그래도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던 점은 뱀파이어에 대적하는 주인공 일행들이 흔히들 CoC에서 나오는 탐사자 무리의 행동양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과, 스토리 중간중간에 나오는 VtM 속 익숙한 용어들 (뱀파이어의 흡혈을 뜻하는 키스, 노스페라투, 므두셀라 등) 덕에 앗 내가 아는 거다 ㅎㅎ 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거라고 할까.. 당연하게도 VtM과는 여러모로 룰과 분위기가 달랐지만 나중에 브틈 세션할 때 드라큘라 백작에 대한 언급을 한다면 좀 더 반갑게 묘사할 수 있을 거라는 점?
소설 내용상 아쉬운 것들도 많지만 브람 스토커 씨 같은 흡혈귀 캐릭터 선구자들 덕에 이 세상에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 같은 TRPG 룰이 탄생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덕분에 제가 재밌게 즐기고 삽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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