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소설
서머싯 몸 「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 후기
2024. 5. 31. 21:37
오리엔트 특급 캠페인을 가기로 하면서 문득 '스파이 캐릭터'를 TRPG 세션 내에서 굴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캐를 짰다. 러시아 스파이로서 이 기차 여행에 신분을 속이고 참가하게 되었다는 배경을 갖고있는데, 현대 가상 속의 작품에 나오는 스파이는 여럿 보았지만 세션 내의 배경이 1923년이니만큼 그 시대에 걸맞은 스파이 캐릭터를 짜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다 친구가 소개시켜준 책이 바로 이 「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이었다. 서머싯 몸 이라는 작가명은 그렇게 익숙하진 않았는데, 그가 남긴 작품 제목을 보면 어 이거? 싶은 익숙한 것들이 상당히 많았다. 정말 많은 작품을 쓴 작가였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전엔 그래도 좀 스파이 소설인 만큼 하나의 큰 사건 위주로 돌아가는 스릴이 있거나 긴박하거나... 이런 느낌의 내용이지 않을까 하고 대략적인 상상을 했지만, 어셴든은 표지에 쓰여있는 대로 '연작 소설집' 그 자체였다. 여러 짧은 단편들이 하나로 묶여있는 옴니버스식 구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비밀 요원이라고 해도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영화처럼 뭔가 펑펑 터지고 액션감 넘치는 상황에 휘말릴 수는 없겠지...(그럼 목숨이 남아나질 않을듯) 내가 짠 캐릭터만 해도 한 전선에 영향을 미칠 만한 연구를 하고있을지 모르는 교수를 몇날 며칠이고 감시하는 지루한 임무를 받고 움직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면에서는 참고할 부분도 꽤 많았지만 내 예상보단 너무도 잔잔하게 흘러가는 내용들에 가면 갈수록 약간 영혼을 빼고 읽은 기분이 들었다. 흥미진진한 부분도 많긴 했지만 이 얘기는 언제 끝나나 싶은 느낌이 좀. 또 등장인물들이 백인 외 타 인종이나 여성에 대해 서술하는 방식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기도 했다. 물론 이건 그 시대 리얼리즘이겠지... 어셴든은 1차대전 무렵이기도 하고 과거 배경 작품 볼 때 시대 배경을 많이 감안하는 편인데도 초반에 자꾸 여성이 나올 때마다 가슴..무슨 가슴..어떤 가슴.. 이러고 있다 가슴얘기 그만좀해라.
어쨌든 내 캐릭터는 영국인인 척 하는 스파이라는 설정을 갖고 있다 보니 본디 영국인인 스파이는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대해 꽤 많은 참고거리가 되어주었다. 어셴든은 전선에서 엄청나게 활약하기보단 조력자로서 활동하는 편이긴 했지만, 작가라는 대외적인(실제로도 그렇지만) 직업을 가진 채 첩보 활동을 어떻게 하는지도 알 수 있었고... 그 시대에 각 나라별로 어떤 이미지인지도 참고할 수 있었다. 영국을 적대하는 인도인과 사랑에 빠진 이탈리아 여성의 이야기라거나, 독일인 아내와 결혼한 영국인 남자라거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시대상 참고용으론 훌륭한 교재가 되어주었다. 원래는 31편을 썼지만 공공 비밀법 위반 우려가 있다는 처칠의 조언으로 열네 편은 파기했다는데, 그걸 보면 정말 자기의 스파이 시절 경험을 완전한 픽션으로 변환하여 쓴 건 아닌 모양이다. 파기된 것들도 어떻게 쓰여졌을지 상당히 궁금했다. 내 캐릭터는 나중에 스파이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가 스파이 소재의 소설을 쓸 거라는 미래 구상을 해 두어서 더더욱..
사실 내가 더 집중해서 읽은 건 소설 본편보다 그 뒤에 나오는 작가 삶에 대한 연대기였다. 어릴 때부터 아주 수많은 일을 겪으며 작가로서 성장했던데, 솔직히 소설보다 서머싯 몸의 인생이 좀 더 흥미롭게 다가오긴 했다... 그리고 와 이거 진짜 쓰레기 아니야? 싶은 부분이 많더라 ㅅㅂ 별거중인 유부녀였던 시리와 교제하다가 전쟁에 구조대로 입대하게 되어 떠나려던 무렵 시리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됨 → 비밀리에 분만할 수 있는 거처를 제공한다고 함 → 전선에서 40살의 나이로 22살 남성과 연애하게 되면서 낙태 종용 → 결국 책임지고 결혼하지만 원치 않는 결혼이었다고 별에 별 작품을 만들어서 떠들고 다니질 않나.. 나중에 시리가 죽었을 땐 위자료를 안 줘도 된다고 노래까지 부르며 기뻐하고ㅠㅠ 이게 참 유명한 사람이 되다 보니.. 개인의 사생활이 역사적으로 길이길이 보전되어 후대에 전해지는 것도 좀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 없긴 하지만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많이도 했다 싶음... 80대 후반 무렵엔 전부인 시리를 악의적으로 비방하는 내용을 담은 인생 회고록을 출간하려다 출판사에게 반려되고 지인들의 비난을 받은 채 앓아누웠다는 걸 보니 좀 착하게 사세요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업보』라고 들어보셧는지
교훈
자기 흑역사가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싶지 않다면 다들 착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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