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소설
매들린 밀러 「키르케」 후기
2024. 7. 1. 15:01
아마 21년도에 선물받았던 것으로 기억하는 키르케를 이제서야 읽었다(익명님 미안해요)
그리스 신화 속 등장인물인 '키르케'의 서사를 여성 대서사시로 염두하여 쓴 소설이라고 들었는데, 사실 신화에 그리 큰 흥미가 없었기에 과연 재미있을지는 모르겠던 상태. 평은 좋지만... 어쨌든 2인 독서모임을 시작하며 미루고 미루던 책을 읽어나갔다. 펼쳐보니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원문에서 이탤릭으로 표현되었고, 번역하여 옮기는 과정에서 그 부분을 고딕체로 표현해놓았다는 게 눈에 띄었다. 한글 기울기체는 가독성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그런가? 원래 이북리더기로 볼 때 거의 무조건 폰트를 바꿔서 보는 편이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이 원본으로 읽었다.. 그래도 이 편집 방식은 읽다보니 꽤 마음에 들더라.
그리스 로마 신화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홍은영 작가님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로 처음 접했는데, 정말 어릴 적엔 책이 닳도록 읽고 또 읽었지만 이젠 내용이 좀 가물가물했음에도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이름은.. 아니 이 이름은.. 이러고 계속 익숙한 인물의 향연이었다. 그래서 다른 소설보단 배경에 더 빠르게 몰입할 수는 있었지만, 사실 난 키르케라는 인물 자체가 낯설었다. 분명 만화로 접했을 때 관련한 내용을 읽기는 읽었을 텐데 내 기억에 그렇게까지 인상깊게 남아있지는 않았던 모양... 신화의 재해석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가 보통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통용되는 키르케의 일생이고, 어디부터가 작가의 생각이 들어간 내용인지는 잘 구분되지 않았다. 그냥 이런 내용이 있구나.. 같은 마음으로 독서한 듯.
그가 무슨 생을 살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읽다 보니... 태어나자마자 그럴듯한 아름다움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타박당하고 형제들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주변 신들이 매번 그의 행동을 비웃기까지 하는 걸 보고 좀 많이 슬퍼졌다... 아니 이렇게까지? ㅠㅠ 난 주인공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견디고 버텨서 극복하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왠지... 이번 책엔 초장부터 몰입을 좀 열심히 해서 그런가? 이런 범세계적 따돌림에 이유없는 악의가 끊임없이 계~속 지속되는게.. 솔직히 읽기 좀 힘들었다. 키르케가 당하는 일들 하나하나를 마주하고 있자니 내가 다 스트레스였다. 소설이라는 게 원래 그런거긴 하지만 아.. 왜 이렇게 이번에 읽기 힘들었을까 싶을 만큼. 대단한 신이라는 놈들이 너무 추잡하고 더럽고 잔인해ㅅㅂ. (근데 그로신 꼬라지를 보면 신은 원래 그런 놈들인듯) 심지어 인간의 목소리를 가졌다고 자기 앞에서 입을 열지 말라고 하질 않나... (하지만 키르케가 자신의 섬에선 입을 다물지 않겠다고 받아쳐서 조앗음)
그리고 내 예상보다 로맨스적 요소가 굉장히 많이 나왔다. 난 로맨스를 좋아하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을 기대하고 본 게 아니라서 자꾸만 남자와 사랑에 빠지거나 자기 섬에 온 남자와 연인으로 지내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듯. 처음에 인간이었던 글라우코스와 잘 지낼때는 꽤 흥미로웠으나, 그가 키르케의 능력 덕에 신이 되자마자 갑자기 키르케는 내버려두고 다른 여신을 찾는 걸 보고 짜게 식은 뒤로는... 주변에 등장하는 남캐들 전부 걸림돌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꼭 살면서 진실된 사랑🩷을 찾아야 하고 그렇게 마음이 다쳐가며 연애를 해야할까? 난 아니라고 본다 키르케야.. 사랑 없인 못 살아도 연애 없이는 잘 살 수 있어
어쨌든 인간이 되어서 잘 살아가게 되었기는 하다만.
그리고 키르케가 여신으로서 인간 세상과 얽히다 보니, 불멸의 입장에서 겪는 필멸자들에 대한 감상은 꽤 인상 깊게 와닿았다. 난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캐릭터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 편인데... (사유: 죽으면 슬프니까) 그렇다 보니 가능하면 내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을 모두 불멸의 존재로 만들고자 했다. 영원한 죽음 때문에 벌어지는 다양한 슬픔과 극복 같은 건 그냥 현실에서나 생각하고 싶지, 즐기기 위해 접하는 취미에서까지 깊이 생각하다간 나 같은 미친 과몰입 인간은 스트레스로 몸져 눕는다는 걸 잘 알고있어서 더 그랬다. 어쨌든 하나하나 그렇게 불멸 요소를 주다 보니 가끔씩 이게 정말로 얘한테 행복한 일일까? 하고 생각하게 될 때가 있었다. 영원히 산다는 건 그만큼 필멸자들의 죽음과 소멸을 반복해서 겪어야 한다는 뜻이고, 그렇다 보면 아무리 맑고 희망찬 캐릭터라도 마음이 닳게 되지 않을까. 마치 던전밥에 나오는 마르실처럼 제 동료들의 수명과 죽음에 집착하면서 변해버리진 않을까.
암사자의 죽음에 슬퍼하는 키르케를 보고 있자니 더 생각이 깊어졌다...
나같은 인간은 반려동물까지 불멸화해버리지만...(ㅋ)
어쨌든 내 예상 밖의 소설이었고 읽기 너무 힘들었지만 선물받은 책을 완독한 것으로 의의를 둔다..
이하 인상 깊은 장면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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