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소설
헤르만 헤세 「데미안」 후기
2023. 12. 22. 04:41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된 데미안 이북.
을유의 책을 고른 기준은 인터넷에서 꽤 평이 좋았고 비교하며 본 구절 번역이 보기 나쁘지 않았으며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매우 중요)
근데 사고 나서 집에 종이책으로 데미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집에 생각보다 책이 많더라.
괜한 돈을 쓴 건가 싶었지만 비교해 보니 을유문화사의 책이 훨씬 더 보기 편하게 번역되어 있어서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여담으로 을유 책은 신의 이름을 아브락사스라고 번역한 판본이라서 좋았다. 내가 그 이름 쪽이 더 익숙한 사람이라..
데미안 리뷰
책을 산처럼 쌓아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는 이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E님과 독후감 모임을 하기로 했다.
올해의 나는 일에 치이고 치여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책을 읽는 것보다 구입하는 컨텐츠만 즐기기 바빴다.
나중에 꼭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며 모아온 책들이 어언 ... 100종류에 육박한 지금..
...
이렇게 놓고 보니까 진짜 심각하네
아무튼 그렇게 서재에 오랫동안 방치되고 있는 책들을 골라 한 달에 하나 정도 읽고 독후감을 쓰기로 약속하면 뭐라도 읽겠지 싶어서 시작한 모임이지만, 첫 실행을 해본 결과 나는 정말 답도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난 하나에 머릿속이 지배당하면 다른 건 동시 진행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흑흑
그 시작이 8월이었는데 결국 12월 말이 된 지금에서야 독후감을 쓰게 되었다. 놀랍죠? 저도 놀랐습니다.
데미안은 워낙 유명해서 어느 정도 제목은 많이 들어보았던 작품이었다. 특히 한창 모 게임 (이제는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것) 때문에 내 트위터 탐라에도 그 게임과 더불어 고전문학 붐이 일었던지라.. 수많은 연성들로 먼저 이미지가 조금씩 잡혔던 상황이었다. 사실 난 심지어 읽기 전까지 데미안의 주인공은 데미안인 줄 알았기에 (ㅋㅋ) 싱클레어라는 인물이 나오는 건 알아도 그가 주인공일 거라곤 예상도 못 했었고. 뭔가... 그 게임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본 것도 얼마 안 되긴 했지만, 그 연성 속 싱클레어는 상당히... 흠. 어리고 철없고 감정적이고.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나름 소설 속의 그도 실제로 별반 다르진 않았던 게 다행이랄까?
그리고... 대망의 '그' 대사를 소설보다 먼저 접해버린 바람에
「눈을 감아, 싱클레어.」
오타쿠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 깊은 명대사라나 뭐라나..
하여튼 그래서 소설 데미안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묘했다.
이거 뭐 대사 분위기 보니 키스라도 하는 거냐? 뭐 이런 식.
그래서 꽤 흥미롭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다만 일상의 스트레스가 높아서인지.. 요근래는 특히 긴 글을 여유롭게 읽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던 거 같다. 더해서 데미안은 내용이 마냥 쉬운 편은 아닌 데다가 나에게 익숙하지 못한 요소들 (ex. 성경) 이 많이 나와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영화 같은 영상물로는 깊이 있는 실존 역사물을 즐겨보는 편이지만 소설은 거의 현대소설이나 로맨스류만 보아왔기에... 고전소설류는 더 완독이 힘들었던 거 같다.
데미안 읽다가 갑자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반절 정도 읽다 말고 맨 처음으로 돌아가고.. (이 짓을 두 번 정도 함)
시작은 10살 무렵의 어린 싱클레어가 프란츠 크로머라는 인물 때문에 곤경에 처하는 것이었는데, 사실 나는 이때부터 뭔가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프란츠 크로머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어 그에게 말한 '영웅담'이 가짜라고 털어놓을 수도, 그렇다고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돈을 퍼다 줄 수도 없는 싱클레어의 상황이 무언가 나의 어린 시절 저질렀던 실수를 강하게 자극하는 기분을 받아서 시작부터 무척이나 괴로운 마음으로 소설을 읽었던 거 같다... 아니 고작해야 또래 애한테 뭐 이렇게 휘둘리는 거야? 그냥 가짜라고 말하면 되잖아?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싱클레어의 나이대가 사소한 이야기로도 자아가 너무 쉽게 추락할 수 있는 미성숙함의 결정체인 걸 알기에 더 심각한 몰입을 했다. 그러다가 데미안이 전학을 온 것이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모를 그만의 방식으로 프란츠 크로머를 단번에 쫓아낸 데미안이란 존재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작용했던 것 같다. 싱클레어도 독자들도 데미안에게 호감을 안 느낄 수가 없는.. 그런 존재처럼 짜여 있었다고 할까. 당연히 나도 데미안에게 열렬한 환호를 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비밀스러우면서도 무시 못 할 카리스마와 매력을 가진 캐릭터를 정말 무척이나 좋아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와 만나고 나서는 특히 성경에 관한 내용이 계속 나왔는데, 난... 종교에 관심이 없고 특히 성경에 대해선 정말 쥐뿔도 관심 없고 잘 몰랐기에 내용을 깊이 이해하기엔 배경지식이 딸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이 평소에 인풋을 늘려놔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카인이니 표적이니... 그런 것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서 한번 성경을 펼쳐 봤더니 무슨 2천 페이지가 넘어서 그냥 이건 제 길이 아닌 거 같군요. 하고 퇴장했다.
너희.. 무슨 얘기 해? 나도 좀 알자...
그렇게 이야기는 데미안과 함께 흘러가는데...
제3장에서는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조금 으응? 스러웠던 부분이, 자꾸만 성적인 무언가에 눈을 뜨는 싱클레어.. 이런 묘사가 나오는데 동시에 데미안의 목에서 풍겨 오는 산뜻한 비누 향. 이런 설명까지 더해지니까 싱클레어의 성적 호기심 대상이 데미안이라는 그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묘한 기류가 있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모 소설을 떠오르게 했다고.
진심으로..
사실 난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단순한 친구를 넘어 로맨스적 감정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싱클레어는 그것까지 알아차리기엔 너무도 어리고 지극히 현실적인 혼란에 담가진 인물이기에 완전한 자각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느꼈다. 사랑 이야기를 너무 좋아해서 무접점 CP를 연성하는 그런 적폐 해석이 아니라(진짜로요) 진심으로 싱클레어는 막스 데미안에게 미칠듯한 집착을 하고 있었고 종래에는 데미안의 친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사랑하게 되는 걸 보면 더욱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너.. 에바 부인이 아니라 실은 데미안을 사랑하는 거야
엔딩 부분에서는 싱클레어가 전쟁에 나가게 되는 장면으로 슬슬 마무리가 되어갔는데, 난 정말로 급박한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약간 아쉬운 마음도 들긴 했었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정말로… 문장 그대로 사태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함께 전장으로 갔고, 그는 그곳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다. 이윽고 큰 부상을 입은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키스를 받은 뒤 그에게서 심리적인 독립을 이루는 것으로 끝난다.
아니 진짜로 키스를 하잖아!
…아무튼, 이 부분에서 좀 거의, 자기 직전의 상황이어서 그랬나? 나는 계속해서 이 소설의 엔딩은 둘 중 하나가 죽거나 사라지는 결말로 끝날 것만 같은 편견 (왤까) 이 있어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가 그치지 않고 흐를 정도의 강한 부상을 입은 싱클레어의 상황과,, 그 속에서 이뤄지는 작별 키스는 데미안의 죽음 (어떤 의미로든) 을 뜻하는 게 아닐지 계속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데미안이 진짜 인물이 아니라 싱클레어의 내면에서만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라는 해석을 하기도 했는데, 나는 솔직히 이 해석에 좀 동의하면서도 사실은 데미안은 실제로 소설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 맞고 단지 때가 되어 싱클레어를 떠나갔다는 결말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기도 했다.
왜냐면 너무 매력적인 인물이니까.
헤르만 헤세의 이상향을 쏟아부은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을 정도로, 데미안은 잘생긴 외모에 끝없는 지적 매력과 비밀스러움까지 모든 걸 갖춘 캐릭터로 그려지는데, 이런 인물이 단순히 싱클레어의 상상 속에서만 그려진 사람이었다면 조금 아쉬움이 생길 것 같았다. 게다가 근 1~2년간 영화를 볼 때마다 자꾸... 또다른 자아 가짜 인물 이런 정신병류 영화를 접하게 되어서 그런 스토리가 슬슬 지겨운 상태기도 했고.. (볼 때마다 아니 또야? 이러게 됨)
E님과의 대화를 하고 행복회로를 돌리며 그가 떠나간 쪽으로 해석을 전향하기는 했지만..
자꾸만 곱씹을수록 그 결말에 마음속에서 의문을 갖게 되는 거 같다.
그는 진짜로 존재했던 걸까, 데미안의 죽음을 암시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싱클레어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아인 걸까..
어쨌든 정말 유명한 소설인 이유를 깨닫기도 했고 이 미쳐날뛰는 현생 속에서 기어이 이 작품을 다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었다. 다른 헤세씨의 소설도 읽어봐야지...
이하는 인상깊은 장면.
난 어릴 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세상이 더 좋은 방향으로만 발전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이제는 안다. 이상과 현실은 너무도 큰 간극이 있다. 세상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걸 깊이 체감했다. 특히나 요즘처럼 창작자들을 향한 갖가지 음해와 무의미한 (정말로, 진심으로, 무의미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공격이 끝도 없이 계속되고 있는 세상을 보면… 데미안이 말하는 문장들이 아주아주 크게 와닿을 수밖에.
싸움이 시작되었지만, 그 싸움이 세계를 개선하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그 싸움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은 언제나 존재할 테고 ―주인만 바뀌겠지―
그 아래 깔린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휩쓸려 가기만 하겠지…
그러나 데미안의 말대로 그 싸움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발전이 있겠지. 이전에는 숨 쉬듯 벌어졌던 인종차별이 얼마나 쓸모없고 가치 없는지 오늘날 밝혀진 것처럼, 현시대에 깊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차별들 또한, 미래에는 그게 얼마나 무가치한 거였는지 많은 이들이 깨닫는 날이 오기만을 진정으로 바란다…….
데미안 후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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