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비문학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후기
2025. 1. 31. 18:53
표지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대체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다.
물고기라는 건 바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생물체인데.
왜 작가는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파격적인 선언(?)을 제목에 박아놨을까?
우리나라의 '물고기'라는 단어가 모든 어류를 식량화 시켜버리는 종차별적 표현이다 보니 이젠 물고기가 아닌 물살이로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외국 작가이니 그런 얘기도 아닐 테고. 그럼 아마도 판타지에 가까운 소설 이야기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위시리스트에 담아둔 책이었다. 게다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추천하던 책 유튜버 겨울서점 님이 이 책을 보려면 그 어떠한 스포일러나 정보도 찾아보지 말라고 권유한 탓에 이게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뭔 내용을 담고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 채 1월의 책으로 정하게 되었다.
시작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가 왜 '스타'라는 미들네임을 만들었는지부터 시작해 존경해 마지않는 형이 군대에 갔다가 발진티푸스(당시엔 원인 모를 '군대열병'이라고 불림)에 걸려 사망하고, 자연물에 큰 관심을 가지며 지도 제작에 열중했지만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 부모님이 그의 작업물을 전부 없애버리기도 하고, 코넬 대학에서 3년만에 학사와 석사를 모두 딸 정도로 빠르게 학업을 마쳤지만 정작 취업에선 난항을 겪고. 큰 지진과 화재가 일어나 평생 수집해온 수많은 표본들이 망가졌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재도전을 하는 모습이란 꽤 인상깊기도 했지만 사실 내 흥미 밖의 이야기에 가까웠다.
음, 그러니까. 이 개인이 대단하긴 한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특히나 작가가 이 사람에 대해 긍정적으로 그리고 싶은 건지 부정적으로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그렇다기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열렬히 애정하는 것 같은데.) 알쏭달쏭한 서술이 이어졌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의 절대 파괴되지 않는 것, 즉 긍정적인 '자기기만'은 꽤 배울 만한 점으로 보이긴 했다. 어찌 보면 남탓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인격에 해가 될 만한 공격을 능수능란하게 막아내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자면 자존감이 잘 상하지 않는 강한 사람의 표상처럼 보이지 않나.
하지만 아무리 그의 초반 일생을 좋게 보려 해봤자. 온 삶의 궤적이 너무나 학연·지연·혈연으로 무장된 특권층 백인 남성 그 자체로만 보였다. 39세의 나이에, 10세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18세 아내를 새로 맞이한 건... 하. 19세기 이야기니 그냥 그렇다 치자. 하지만 성적 추문에 휩싸인 남성 동료를 어떻게든 옹호하기 위해 무고한 사서를 성도착자로 몰지를 않나. 그 사실을 알아낸 다른 동료를 기회가 오자마자 해고해버리기까지 하고. 남획으로 죽어가는 물개를 보호하기 위해 지치지 않고 노력을 펼쳤다지만, 애초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물고기 표본 수집을 위해 폭탄을 터뜨리고, 독까지 이용해 물고기를 몰아 낚아채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평화를 옹호한 일'로 메달을 받았다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19-20세기 역사의 한장면이었다.
그러나 결국, 10장이 되어서야 이 모든 '긍정적' 빌드업이 결실을 맺는다. 스탠퍼드 대학의 창립자 중 하나였던 제인 스탠퍼드의 기묘한 죽음을 묻어버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하다가 결국 명예총작직만 유지한 채 사퇴한 조던. 그가 우생학에 큰 관심을 가지며 강제불임시술 합법화에 앞장섰다는 내용은 이 책의 큰 반전이 된다. 열성적힌 분류학자였던 조던이 세계를 뒤집은 악행의 주도자라니. 이래서 아무런 정보도 접하지 않은 채 읽으라고 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긴 했다. 하지만 그 반전을 위한 긍정적 빌드업이 너무 길다. 조금도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 물고기 분류학자의 일생을, 이 책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 건지 그 이유도 모른 채 머릿속에 집어넣자니 이걸 내가 왜 읽고 있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 그냥 내가 너무 인내심이 없는 걸까….
But 자기기만 버전의 나: 하지만 그 빌드업을 충분히 재미있게 쓰는 게 작가의 능력일듯. 내잘못 아닌듯.
좀 지루하긴 했지만 이 책에서 배울 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요즘처럼 온·오프라인 전부 극우들이 미쳐날뛰는 세상에서 말이다. 남들은 전부 틀렸고, 오로지 자기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꽤나 잘 와닿았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이들이, 그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 어디까지 남을 짓밟을 수 있는가. 명백하게 헌법을 짓밟은 대통령을 옹호하고자 법원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내가 옳은 사람을 뽑았다는 긍정적 착각을 너무 긴 시간 방치한 나머지, 그 착각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무지'를 무기로 자신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치명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오히려 그 현실을 알리고자 하는 사람들을 악인으로 만들어 매도하는 이들. 우생학을 밀어붙인 사람들의 논리가 딱 그랬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평등과 존귀함을 말하는 상식인들의 주장을 격파하기 힘드니 '넌 너무 감정적이야'라는 언어로 대응하는 강제불임 찬성론자에 대한 이야기도 너무나 큰 공감이 되었다. 며칠 전 TV 토론회에서 논리적인 주장을 하는 유시민 작가에게 당신의 주장은 너무 감정적이라고 대응하던 홍준표 시장의 발언을 봤기 때문이다…. 정치·사회계에서 이런 비상식적인 반박은 정말 유구했구나.
어류는 존재하나요?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하, 이제 모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선 먹기를 그만둬야 하나요? 네.
어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과학은 시간에 따라 진리가 변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류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내 반응은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구나." 정도였다. 나는 과학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나의 상식이 알고보니 틀렸을 경우 이를 고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이젠 알고 있어서.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외로 자신의 상식이 틀렸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지식에 대한 지적이 마치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공격으로 느껴져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나도 그랬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어떠한 부분에서는 어류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내 말에 반박하는 사람들을 기피하려 들지 모른다. 이 시대의 누군가는 트랜스젠더라는 것이 존재해선 안되는 자들이라고 욕하고 그들의 생명 자체를 부정한다. 미국에서는 이제 여성과 남성 이분법적인 성 외엔 다 거짓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이 현실화 되고있다. 그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조차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서 없는 사람들이 될까? 우생학 지지자들이 장애인, 부랑자, 범죄자를 모조리 모아다 절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졌냐는 말이다.
나는 내가 여성임에 별다른 의심이 없으며 '젠더 스펙트럼'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기에 트랜스젠더에 대해 무어라 열정적인 말을 내놓기엔 부족함이 많다. 하지만 아무런 죄 없이 살아있는 사람들인데 '부적합성'을 이유로 사실상 사회에서 말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꼭 유대인을 죽이던 나치 같잖아. 젠더에 관해 잘 모르겠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고, 모든 걸 완벽하게 이해하진 않았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게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건 아니지 않나. 적어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종에 등급이 있다고 믿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 같은 사람이 되고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래, 책에서 인용된 문구처럼.
그냥 한번만이라도, 내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음을 고려해보는 것.
이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이하는 인상깊은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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