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비문학
존 더글러스 「마인드헌터」 후기
2024. 4. 12. 12:42
빗방울처럼, 우린 이렇게 흐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마인드 헌터. 존 더글라스와 마크 올셰이커의 프로파일링 관련 에세이. 예전에 우연히 누군가의 추천글을 보고 위시리스트에 넣어 두었던 책인데, 마침 인생 최초로 도서관 회원증을 끊고 빌려올 만한 책을 고민하다 골랐다. 이렇게 괜찮은 도서관이 있는데 왜 이제서야 가게 된 걸까? 검색해 보니까 위시리스트에 넣어둔 책들 거의 다 있던데. 진작 회원가입 했으면 돈을 엄청나게 아꼈을 거같다....
아무튼 처음엔 넷플릭스 시리즈도 있는 FBI의 전설 같은 사람이 쓴 에세이라기에 막연히 흥미롭겠다 생각하며 도서관으로 가 책을 찾았는데... 막상 빌리려고 보니 상당한 양의 두께(약 580페이지)에 멈칫했다.
아.. 내가 지금의 이 정신-신체 건강 상태로 이 책을 2주 안에 다 읽을 수 있나? 의구심이 들었고 (결국....전부 다 읽진 못하고 반납함) 어쨌든 그렇게 나의 첫 도서관 대출책이 되었다...
도입은 굉장히 강렬했다. 저자가 밀려드는 직업적 스트레스와 과로에 큰 병을 앓고 쓰러진 충격적인 장면부터 시작한 바람에 궁금증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었다. 흥미로운 글을 시작하는 법을 제대로 아는 것 같았다고 할까... 그 장면이 마무리되고 나면 뒤에서 본격적으로 저자가 어쩌다가 FBI에 들어가 범죄심리학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설명을 하긴 하지만, 이렇게 시작하니 지루함이 덜했다.
우선 마인드헌터를 읽고 느낀 가장 첫 번째 감상은 전체적으로 무겁고 심각한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정말 매끄럽고 재미있게 잘 쓰였단 점. 옮긴이도 번역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게 눈에 보였다. 여기서 책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다. 난 번역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
물론 저자가 20세기 중반에 태어난 미국인이다 보니 가끔씩 나로서는 정서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거나...(ex.신부님 앞에서 자기 약혼녀로 구린 농담하기) 시대배경 탓에 공감이 안되는 내용도 간간이 보이긴 했지만(ex. FBI와 사건 내에 만연한 인종적-성별적 문제) 그건 감안할 정도였다.
두 번째. 사건 수위가 너무 끔찍하다. 이 책에는 수십명에 달하는 연쇄살인범과 그들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쓰여있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써도 괜찮은 건가? 싶을 만큼 사건의 자세한 경위와 피해자의 발견 상태 등등이 세밀하게 적혀있는데, 그냥... 보기만 해도 역겹고 이성이 깎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에드먼드 켐퍼가 저지른 살인사건 이야기를 읽을 때엔 뇌에 이 모든 내용을 정확히 담았다간 꿈에 나오기라도 할 것 같아서(안그래도 악몽 잘 꿈) 흐린 눈을 하고서 적당히 슥 넘기듯 읽기까지 했다...
왜 CoC 탐사자를 선택할 때 경찰관 옵션을 넣으면 이성을 깎고 시작하는지 너무도 잘 알 것 같았다.
세 번째. 아.. 두꺼운 책 읽기 개힘들다... 도서관이 있는 건 좋은데. 두꺼운 종이책을 빌려와 읽자니 정말 각잡고 큰 노력을 기울여 한장한장 넘기며 읽어야 한다. 독서대로는 잘 고정이 안 되고 그렇다고 책을 책상에 걍 올려두고 읽자니 목이 아파 죽겠다. 읽기가 왤캐 힘든 거야? 이북이 짱인듯 그냥..
“어떤 화가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을 보지 말고 그림을 보라.”
그 사진들은 더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했다. 하지만 나는 사진에 담겨있는 장면들이 그런 짓을 저지른 자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는지, 그리고 범인을 체포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사실 나는 그때 이후 늘 끔찍한 그림 뒤에 숨은 범인의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왔다.
나는 지금 예술계의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워낙 이런 쪽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편이라, 가끔 다른 직업, 특히 이런 범죄를 다루는 일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TRPG에서 범죄 관련 수사를 하는 캐릭터들을 만들고 굴리다보면 아 내가 직업이 이쪽이었으면 좀 더 실감나게 RP했을텐데 같은 생각을 할 때도 있고(ㅋㅋ)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더더욱 이번 생에 그런 직업은 가질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살인범들에 의해 낱낱이 해부되고 토막나있는 광경을 수 없이 반복해서 보고, 또 보고, 분석하고, 다시 보고... 이런 행동들을 반복하다 보면 사람이 사람으로 보일까? 내 주변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온 시간을 쏟지는 않을까? 나라면 정신에 너무나 큰 타격을 입을 것 같았다. 정말 어지간한 멘탈론 시도도 못할 거다. 권일용 교수님이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주 말씀하시던, 살인자의 진술을 들으면서 다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된단 내용의 문장도 떠올랐고...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가장 부러운 점을 꼽자면 역시 땅덩이가 넓은 미국답게 범죄자를 몰아넣을 교도소도 크게크게 지을 수 있단 거고, 그만큼 형량도 세게 때릴 수 있는 점이었다. (물론 이 땅덩이의 크기가 치안의 약화와 총기 사용의 정당성 등에 큰 영향을 미치겠지만....) 위에서 말한 에드 켐퍼는 8회 종신형에 처한 '다중 종신형 죄수'였는데, 이는 사형제도가 없는 일부 미국의 주에서 흉악범을 평생 복역시키기 위해 쓰는 방법이라고 한다. 1회 종신형일 경우 감형을 받아 가출옥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해자에게 여러 번의 종신형을 선고해 아예 희망의 싹을 잘라버리는 거다. 여러 번의 범죄를 저질러도 중첩된 형을 내리긴 커녕 처음 들키면 초범이라고 감형을 해주기까지 하는 대한민국과는 너무도 차원이 달랐다. 물론 우리나라는 땅덩이도 사람도 전부 모자란 국가이니 쉽사리 비교할 순 없지만... 그래서 결국 좀 땅이 넓고 인프라가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이 좁고 척박한 땅에 서울로만 모여 바글바글한 게 아니라.
또, 마인드헌터 독서하던 시기에 인터넷상에서 모 인물이 성매매 관련 실언을 하여 큰 비난을 받고 있던 상황이 벌어졌는데.. 책 속에서 마침 그와 관련하여 인상깊은 구절을 읽었다. 매춘을 직업으로 삼은 여자가 성범죄 위기에 놓이자 큰 피해를 면하기 위해 범인에게 협조적으로 굴었더니, 오히려 범인이 격분하여 그 여성을 죽여버린 사건이었다. 그 범인은 또 다른 여자에게도 성범죄를 저질렀는데, 이때 그 피해자는 암에 걸린 아버지가 걱정된다고 말하며 범인의 연민을 샀다. 범인에게도 암에 걸린 형이 있었고, 결국 그 여자는 기적적으로 풀려났다.
두 피해자의 생사를 가른 결정적 사유.
성을 파는 여자는 범인에게 그저 '사물'이었고, 아버지를 걱정하는 여자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이었기에...
“그 여자는 내가 어떤 방식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그 여자의 협조적 태도가 몬티의 기분을 좋게 하거나 느긋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분케 했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 ‘즐길’ 수 있다니. 그것은 모든 여자가 매춘부라는 느낌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 순간 그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 되어버렸고 사람이 아닌 사물을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누군가는 성매매를 합법화하면 음지에서 벌어지는 악행이 더 줄어들고 데이트 폭력이나 강간 같은 범죄들이 더 줄어들 거라고 말했지만(진짜 뭔 개소리야?) 결국 다른 많은 국가에서 그렇듯이 성매매를 합법화하는 순간 여성을 물건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날 거다. 어차피 '합법'이니까 성매매를 하지 않는 평범한 여성에게도 얼마 주면 몸을 팔 거냐는 그런 열받는 질문들을 해댈 거고(실제로 타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 범죄가 줄어들긴 커녕 더 폭증할 게 뻔하다.... 인용 구절에서 말했듯 사물을 부수는 건 사람을 때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일 테니까.
성매매가 불법인 지금도 남의 몸으로 돈벌고 싶어하는 포주들이 이렇게 차고 넘치는데. 합법화라도 되면 자긴 가만히 앉아있기나 하면서 남의 몸만 강제로 착취해 돈 벌어먹는 인간들이 또 얼마나 늘어날까? 정말 너무도 당연한 결말이다.
흉악범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여행길은 끊임없는 경탄과 통찰이 뒤따르는 발견의 길이다. 연쇄 살인범을 굳이 정의하자면 ‘성공적인’ 살인범이라 할 수 있다. 범죄를 해나가면서 그 경험에서 자꾸만 배워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수사관들은 그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괴룡은 늘 이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괴룡이 점점 더 이기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막아내고 있다. 그러나 괴룡이 상징하는 그 악의 세력, 내가 청춘을 다 바쳐 싸워온 그 악의 뿌리가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그 괴룡이 어떻게 생겼는지, 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지, 실제 그대로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생각의 작은 결실이다.
비록 후반부의 사건 몇개는 못 읽고 책을 반납하긴 했지만 읽은 것들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고 재미있었다. 한번 대출 연장을 했음에도 다 못읽은 건.... 역시 너무 각잡고 읽어야 하기 때문이겠지... 이북이면 그냥 밥먹으면서도 볼 수 있는데.... 나머지들은 나중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도록 하겠다. 넷플릭스 드라마도 봐야지.
끝
그 외 인상깊었던 구절:
그리고 내가 행동과학부의 작전 분야 부서장이 되었을 때, 나는 부서 이름을 수사지원부로 바꾸었다.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솔직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행동과학이라고 하니까 행동을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백열 전구에 불이 들어오도록 하려면 정신과 의사가 몇 명 있어야 할까 물으면, 정신과 의사는 한 명만 있으면 되고 전구가 저절로 불을 켜야 한다*고 대답하는 식이었다.(*정신과 범죄자-전구-가 병이 낫고 안 낫고는 범죄자의 마음대로라는 뜻.) …(중략)… 환자가 나을 생각이 전혀 없으면 얘기는 달라진다.
“저기, 흘러내리는 빗방울 두 개가 보이지요? 차창의 왼쪽 빗방울이 차창 바닥에 떨어지면 곧이어 오른쪽 빗방울이 아래로 흘러내려요. 우리는 슈퍼볼 때문에 이 짓을 하는 게 아니에요. 아래로 흐르는 빗방울처럼, 우린 이렇게 흐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존, 당신이 무슨 수단을 써서 막으려 해도 우리를 저지할 수는 없어요. 우린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거예요.”
1993년 수사국에서 은퇴한 내 동료 로이 헤이즐우드는 ‘무엇을, 누가, 왜’라는 세 개의 의문과 단계로 이 분석을 구분했다. ‘무엇’이 발생했나? 이 질문에는 범죄와 관련된 행동의 중요 사항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왜’ 그런 식으로 발생했나? 가령 왜 살인한 다음에 시체를 도륙했나? 왜 귀중품을 가져가지 않았나? 왜 강제 침입하지 않았나? 이 범죄에서 중요 행동 요인들을 설명하는 이유들은 무엇인가?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누가’ 그런 이유로 그 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 바로 이런 것들을 조사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